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6. 6世 〉43. <부정공>백운재이건기(白雲齋移建記)
1. 문헌 목록 〉6. 6世 〉45. <부정공>저존재기(著存齋記)절민공재실(節愍公齋室)
1. 문헌 목록 > 6. 6世 >  
44.<부정공>백운재동재신성기(白雲齋東齋新成記)
白雲齋東齋新成記 祖曰參議孫曰直長其墳墓之序也山曰白也齋曰白雲慕狄公望雲思親之義也其旨深矣伏惟我參議府君即麗朝忠臣虔谷先生之長子端廟忠臣節愍敎官兩先生之伯兄伯考也當世祖丙子其弟其姪同六臣禍既效比干之忠則以弟兄叔姪之親惡能免此禍乎盖以義推之府君當日之事惟宗祀是重故見幾遐擧墓亦失傳殆若殷末微子去之之意也實其配 贈貞夫人靑山鄭氏藏也其後子孫招魂葬焉其下直長府君以世宗大王八男敬孝公琰之壻早年登科官至尚瑞院直長而與當時名流作同庚會盖明人倫之義也皇天不假其年飛不盡翰卒于京第歸葬于此令人李氏合窆齋凡五楹甚得奐之美然子孫如雲恐有寝食之不安故宗議齊發歲自丙午冬十月至丁未春二月功以吿訖以東齋之所以成也當時賢勞琪鉉東潤鍾哲也而鍾哲居近專任焉請余記者光枓東貴東冑也噫凡我諸宗勿以近小而忽之益新加工如今日之爲焉則何患乎宗事之不逮乎此朱夫子甞論天下事曰近小者尤難而遠大者還易之訓也盍相勉乎哉于是記之 戊申秋七月白露節 後孫 東勲 謹記 백운재동재신성기(白雲齋東齋新成記) 할아버지 참의공(參議公)에 손자 직장공(直長公)은 그 묘소의 차례요, 백야산(白也山)이며 재각을 백운재라 이름한 것은 적량공(狄梁公)이 흰 구름을 바라보고 어버이를 생각한 뜻을 기린 것이니 그 뜻이 깊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참의부군은 곧 고려충신 건곡(虔谷) 선생의 장자요, 端宗 때 충신 節愍公 敎官公 두 선생의 백형(伯兄), 백고(伯考)이다. 세조(世祖) 병자년에 그 아우와 그 조카가 사육신과 함께 화를 입어 이미 비간(比干)의 충성을 바쳤으니 제형 숙질의 친족으로 어찌 화를 면하려 하였겠는가. 대개 의리로써 미루어 생각하면 부군의 당일 일은 오직 종사가 이보다 중하였기 때문에 기미를 보고 멀리 떠났다가 묘소까지 잃고 말았으니 자못 은나라 말에 미자(微子)가 버리고 간 뜻과 같도다. 실로 그 배위 증 정부인 청산 정 씨(贈貞夫人靑山鄭氏)의 유택에다 그 뒤에 자손들이 혼을 불러 장사하였고 그 아래는 직장 부군이 세종대왕의 八남 경효공(敬孝公) 염(琰)의 사위로 조년(早年)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상서원 직장(尚瑞院直長)에 이르고 당시 명류(名流)들과 더불어 동경회(同庚會)를 만들었으니 대개 인륜을 밝히고자 한 뜻이었다. 하늘이 공의 수를 더 빌려주지 아니하여 한참 날으려 할 때 나래를 다 펴지 못하고 서울 집에서 세상을 뜨고 마니 여기에다 반장하고 영인 이 씨를 합폄하였다. 무릇 五간 재각은 심히 웅장한 모습을 갖게 되었으나 자손이 구름같이 많고 보니 침식이 불안할 염려가 있는 고로 종중 의논이 합치하여 동재(東齋)를 병오년 十월에 착공하여 정미년 二월에 완공하니 당시에 수고한 사람은 기현(琪鉉), 동윤(東潤), 종철(鍾哲)이요 청문한 자는 광두(光枓), 동귀(東貴), 동주(東冑)였다. 아! 무릇 우리 모든 종당은 가깝고 작다고 경홀히 말고 더욱 새롭게 공력을 더하여 오늘날과 같이한즉 어찌 종사(宗事)가 미치지 못할까 근심하리오. 이는 주부자(朱夫子)가 일찍 천하사를 의논할 때에 가깝고 작은 것이 더욱 어렵고 멀고 큰 것이 도리어 쉽다는 훈계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이에 이를 기록한다. 後孫 東勲 삼가 기록함 註: ③적량공(狄梁公): 당(唐)나라 때 학자인 적인걸(狄仁傑)을 말한다. 그의 봉호(封號)가 양공이다.
 
1. 문헌 목록 〉6. 6世 〉43. <부정공>백운재이건기(白雲齋移建記)
1. 문헌 목록 〉6. 6世 〉45. <부정공>저존재기(著存齋記)절민공재실(節愍公齋室)